번뇌
우리 몸은 번뇌에 민감하게 되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몸 또한 진여이니 진여는 분리된 이원화에 즉각 대응한다. 나라는 것을 세우면 나 아닌 것과 부단히 대응한다. 순역(順逆)이 나타나는 것이다. 번뇌가 있는 곳은 이원화가 된 곳이다. 우리는 이 이원화를 아는 앎을 확보함으로써 다시 제자리로 온다. 제자리로 온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원래부터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의 자리이다. 수연심과 부동심을 모두 아우르는 진여이다.
이 주제는 자기가 스스로 깨달을 일이지 누가 말해주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이 실체 없슴을 깨닫는다는 것은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경천동지 할 일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이런 주제(삶은 실체가 없는가 등)에 처음 부터 관심이 있지는 않다.
대신 뭔가 흥미 있는 일을 추구하다 보면 그 일의 끝간데 까지 가보게 되고 거기서 의외로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거나 좀 더 내밀해지면 허망하다고 느끼곤 한다.
그런 일을 두번, 세번 겪어보면서 일들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경험도 설풋 지나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예민한 사람들은 거기서 그 허망함의 이유에 궁금증이 깊어져 본격적으로 알아보려 덤벼들기도 한다.
또 그 반대로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이 재미가 없으니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것 저것을 경험하면서 표면의식엔 분명치 않으나 뭔가 심연에 명확히 표현할수 없는 낌새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끝없이 흥미거리를 찾아 평생을 방황하는 부류도 적지 않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 허망함이 우리 자신의 본질인 "실체 없슴"이 근저에서 일렁거림 때문이라고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작용이 빚어낸 향기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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