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점

주역을 의리서(義理書)로 보는 사람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나는 점서(占書)로 보는데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게 훨씬 재미있다. 사람들은 자기와 관련된 미래를 무척이나 알고싶어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 일은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의 모든 일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변수도 많고 드러난 요인만 해도 많고 많다. 그런걸 모두 계산해서 미래를 알게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즘 말하는 AI라면 가능할까? 난 모르겠다. 주역점은 이런 딜레마에 번쩍이는 힌트 같이 뭔가를 일러준다. 알려주는 존재는 신이나 뭐 그런 절대자는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미 모든 걸 포함하고 있다는 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근거이고, 그런 게 있다는 게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니 점(占)은 점치는 자의 크기나 깊이에 크게 좌우된다. 나랏 일을 점칠 때 필부가 보는 점과 나랏님이 보는 나랏일이 관점과 깊이에서 확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삶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이 주제는 자기가 스스로 깨달을 일이지 누가 말해주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이 실체 없슴을 깨닫는다는 것은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경천동지 할 일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이런 주제(삶은 실체가 없는가 등)에 처음 부터 관심이 있지는 않다.

대신 뭔가 흥미 있는 일을 추구하다 보면 그 일의 끝간데 까지 가보게 되고 거기서 의외로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거나 좀 더 내밀해지면 허망하다고 느끼곤 한다.

그런 일을 두번, 세번 겪어보면서 일들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경험도 설풋 지나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예민한 사람들은 거기서 그 허망함의 이유에 궁금증이 깊어져 본격적으로 알아보려 덤벼들기도 한다.

또 그 반대로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이 재미가 없으니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것 저것을 경험하면서 표면의식엔 분명치 않으나 뭔가 심연에 명확히 표현할수 없는 낌새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끝없이 흥미거리를 찾아 평생을 방황하는 부류도 적지 않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 허망함이 우리 자신의 본질인 "실체 없슴"이 근저에서 일렁거림 때문이라고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작용이 빚어낸 향기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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