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점

주역을 의리서(義理書)로 보는 사람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나는 점서(占書)로 보는데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게 훨씬 재미있다. 사람들은 자기와 관련된 미래를 무척이나 알고싶어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 일은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의 모든 일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변수도 많고 드러난 요인만 해도 많고 많다. 그런걸 모두 계산해서 미래를 알게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즘 말하는 AI라면 가능할까? 난 모르겠다. 주역점은 이런 딜레마에 번쩍이는 힌트 같이 뭔가를 일러준다. 알려주는 존재는 신이나 뭐 그런 절대자는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미 모든 걸 포함하고 있다는 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근거이고, 그런 게 있다는 게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니 점(占)은 점치는 자의 크기나 깊이에 크게 좌우된다. 나랏 일을 점칠 때 필부가 보는 점과 나랏님이 보는 나랏일이 관점과 깊이에서 확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신심명과 크리슈나무르티

 신심명의 첫 구절은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澤)입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단지 간택을 꺼려할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간택이란 좋고 싫음에 따라 선택하는걸 말한다고 하면 어떻게 간택을 안하고 살수가 있을까요? 일상 생활이 모두 간택의 연속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 어쩌라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의 책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 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아버린 것들로 부터 어떻게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아는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유혐간택'이라는 승찬대사의 말을 다시금 생각해봅시다.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간택 멈추기는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 말을 수긍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원적 생각들을 넘어서야 비로소 간택을 해도 간택함이 없는 곳에 이릅니다.

승찬대사도 뒤에 다음과 같은 사구게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불식현지(不識玄旨) 도로염정(徒勞念靜) 깊은 뜻을 모르면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려 할 뿐이다.


깊은 뜻(玄旨)이란 이원적 생각 넘어서기 즉 깨달음 입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간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그 책도 처음 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슬림(또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종교적 도그마로 부터 자유로와 잘 수 있을까요?


나에게 묻지말고 스스로 찾아보라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합니다. 가능한 것이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다시 보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눈이 바로 당신입니다.

 


[출처] 신심명(4) (대적광) | 작성자 지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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